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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해 소리치다.

그들은 왜 뛰어내렸을까?

옆동에서 벌써 3명의 사람이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

아침부터 이모가 부산스럽게 깨우더니 창밖으로 내다보라고 하셨다.

뭔일인가 싶어 베란다 창을 통해 옆동을 바라보니 2층과 3층 사이에 있는 난간에 빨간 피가 스며든 하얀 천이 깔려있었다.


새벽에 어느 아저씨가 자살을 하셨고, 그걸 부인이 목격해 신고한거란다.

이른(?) 아침부터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떨어진 곳이 우리 집에서 굉장히 잘 보였고, 무엇보다도 같은 동에서 몇 명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어릴적에 그 동에서 큰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자살한 가족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치른 굿판이었는데, 무당이 춤을 추며 작두를 타는 걸 봤던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며느리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셨던 할아버지가 뛰어내리셨고, 동거하는 남자의 폭력에 지쳐 뛰어내린 젊은 여성도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같은 동에서 한 남자가 또 뛰어내렸다.


이쯤되니 그 동의 지리적 문제가 언급될 만하다.

수맥이 흐르는 것일까. 아님 예전에 우리 아파트가 공동묘지가 있던 야산을 깎아 만들어서 그럴까.

어른들 말씀으로는 귀신이 씌인 집은 온갖 시련이 있지만, 그걸 버티면 대기만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하던데.

만약 귀신이 씌였다고 해도 그 동의 악한 기운은 차마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을지 모른다.


굳이 악한 기운이 없어도 많은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하고 성공(?)한다.

점점 '살아가기'가 아닌 '버티기'의 삶으로 바뀌는 거친 세상에서 누구나 자살을 한번쯤은 생각해본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무엇에 홀린 듯 창가로 다가서서 뛰어내리는 사람.

혹은 술의 힘을 빌려 추락을 결심하는 사람.

그도 아니면 온몸에 이불을 감싸안고 뛰어드는 사람.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그들의 심정을 지레짐작 할 수 밖에 없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겠지만, 아마 외로움이 가장 컸으리라.

가족과 친구가 있어도 진정 나를 위하는 것 같진 않았을 것 같고,

세상에 나 혼자뿐이어서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 같고,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는 지인들을 상상하며 스스로가 가치있었음을 확인해보고 싶었을 것 같고,

더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절망감에 갑자기 사무치게 외로워졌을 지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그들이 무슨 연유로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고, 이해도 가지만 공감은 가지 않기에 그들의 자살이 더 슬프게 느껴진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곧 자기의 일로 돌아간다.

청소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계단을 쓸고 닦으시고, 경비 아저씨는 출퇴근 차량을 정리하신다.

동네 주민들도 출근하느라 바빠 관심을 오래 두지 않는다.


죽은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곧 자기 영역으로 들어가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

뛰어 내리기 전에 느꼈던 외로움보다 뛰어내린 후 식어가는 사람들의 무신경에 그들은 더 외로울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